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그리스 내전 (문단 편집) == 배경 == 그리스에서는 [[튀르키예 독립전쟁]]의 패전으로 왕정이 무너지고 1924년부터 1935년까지 '[[그리스 제2공화국|제2공화정]]'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결국 왕당파가 다시 정권을 잡아 왕정 복고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막상 왕정 복고를 하고 총선을 치르니 제2공화정을 강력히 지지하던 자유당 등이 왕당파에 맞먹는 세력을 확보하여 정부 구성이 이뤄지지 않았다. 이렇게 공화파와 왕당파가 백중세로 씨름하는 틈을 타 공산주의자들은 공화파와 연정을 꾀해 세력을 늘려나갔다.[* 당시 그리스 공산당에는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으로 그리스로 이주하여 '튀르키예인' 취급받으면서 겉돌던 그리스인들이 대거 참여했다.] 그러자 1936년 왕당파 군인 중 한 명인 [[요안니스 메탁사스]] 장군이 군사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고 국왕을 무력화한 권위주의적인 군사 독재 정부('''8월 4일 체제''')를 수립했다. 국왕 [[요르요스 2세]]는 꼴도 보기 싫은 공화파와 공산주의자들을 두고 보느니 메탁사스의 [[쿠데타]]를 지지하기로 했다. 이렇게 메탁사스 정권에게 공화파와 공산주의자가 두들겨 맞으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유럽]]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나치 독일]]이 유럽 대륙을 장악하며 승승장구하던 것을 보고 배알이 꼴린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두체]] [[베니토 무솔리니]]가 그리스를 자기네 세력권으로 편입하겠다며 [[1940년]] 겨울 [[그리스 침공]]을 개시했다. 그러나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이탈리아군이 워낙 못 싸우다 보니]] 핀도스 산맥 등 그리스의 험준한 지형에 의지한 [[https://ko.wikipedia.org/wiki/알렉산드로스_파파고스|알렉산드로스 파파고스]](Αλέξανδρος Παπάγος) 장군의 그리스 왕국군에 막혀 진격이 지지부진해졌고 오히려 반격한 그리스군에게 격퇴당해 알바니아로의 진격을 허용하는 굴욕마저 당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메탁사스가 [[이탈리아 왕국군]]의 침공을 받기 전까지 추축국에 우호적인 친독 성향의 독재자였다는 것이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될 것을 무솔리니가 쓸데없이 판을 벌리는 바람에 알아서 적을 하나 더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를 본 영국이 본격적으로 그리스를 도와 발칸 반도에 개입하기 시작하자 영국의 유럽 대륙 내 교두보 확보를 우려한 [[나치 독일]]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가 발칸 반도에 개입하기로 결정하고 1941년 4월 [[유고슬라비아 침공]]을 시작으로 발칸 반도 대부분을 장악했다. [[독일 국방군]]은 유고슬라비아를 점령하자마자 곧바로 그리스를 침공했고 압도적인 독일군의 공세를 버티지 못한 그리스는 전 국토가 추축군에게 점령당했다. 독일군의 공세가 시작되자 혼란 속에 급사한 메탁사스의 뒤를 이은 총리 [[https://en.wikipedia.org/wiki/Alexandros_Koryzis|알렉산드로스 코리지스]](Αλέξανδρος Κορυζής)가 4월 18일 스스로 목숨을 끊자 메탁사스 정권의 반대파였던 [[https://en.wikipedia.org/wiki/Emmanouil_Tsouderos|에마누일 추데로스]](Εμμανουήλ Τσουδερός)가 총리직을 승계했고 수송 수단이 없는 상태에서 수송로가 독일군에 의해 차단되자 알바니아 주둔 그리스 제1군 사령관 [[https://en.wikipedia.org/wiki/Georgios_Tsolakoglou|요르요스 촐라코글루]](Γεώργιος Τσολάκογλου)는 독일군에게 무조건 항복했다. 그의 항복은 치욕 속에서 이루어졌는데 4월 20일 에피루스의 보토나시에서 독일군의 디트리히 장군에게 항복했다. 이틀 뒤에는 제2차 항복협정에 서명했으며 독일군 최고사령부가 이에 만족하지 않자 결국 테살로니키로 날아가 이탈리아 장군 페레로와 독일군 장군 요들 앞에서 제3차 항복협정에 서명했다. 무려 300,000명의 그리스군 병력이 포로가 되거나 무장해제되었으며 그리스에 파견되었던 영국군 50,600명은 4월 23일에 그리스 본토에서 탈출했다. 4월 27일에는 수도 아테네에 독일군이 입성했다.[* 《그리스와 제주, 비국의 역사와 그 후》 p.100] [[그리스 왕국]]이 추축군에게 점령되자 그리스 왕실과 정부는 아직 점령당하지 않은 [[크레타]]로 도피했으나 [[크레타 섬 전투]]로 크레타마저 독일군에게 함락당한 후에는 [[이집트 왕국]]의 [[카이로]]로 도피해 망명정부를 꾸렸다. 그리고 점령당한 그리스 본토에는 나치 독일의 [[괴뢰국]]인 '''[[그리스국]]'''이 수립되었다. 왕당파 장교들 다수는 1개 보병여단, 1개 특공대대, 2개 비행중대와 소수의 [[군함]]을 이끌고 왕실이 있는 카이로로 망명했지만, 추축군에 맞서 그리스군을 지휘한 파파고스 장군은 부하들을 두고 어딜 가겠느냐며 포로가 되었다. 한편 메탁사스 정권에게 얻어 터지던 공화파와 공산주의자들은 산으로 도망쳐 각기 저항 점조직을 구성하고 대독 무장투쟁을 준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